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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에 기반을 둔 신뢰인가?
    아침 그리고 저녁 2022. 11. 15. 17:13

    이틀전 큐티를 하면서 다니엘 친구들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느부갓네살 왕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는 그들을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지게 할 위험 앞에 놓이게 했다.

    왕은 그들이 신상에게 절하기를 협박과 함께 설득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풀무불에 던져지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실 이가 누구냐면서 말이다.

    일종에 조롱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현실감 있는 조롱 말이다.

     

    그런 왕에게 친구들의 대답은 바로 “왕이여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의 고백 속에 있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나의 상황을 낫게 하시는데만 목적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는 고백이 담겨있고 상황의 나아짐과 관계 없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신뢰, 믿음을 거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크게 감동되어 나에게도 그런 고백이 삶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내 삶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다가와 현실 안에 다양한 일과 관계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 말은 즉, 기도를 하면서 어떠한 믿음의 기도라 하더라도 ‘내가 그리는 모습’이 기도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말은 또한 기도는 내가 그리던 모습과 상관없이 삶 안에 침투해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론 굉장히 공격적으로 말이다.

     

     

    최근 나는 이혼했던 일들로 우리 그룹의 묵상모임에서 눈물을 흘린적이 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이혼 했을 당시에도 내가 저지른 실수가 너무 많아서 많은 말을 할 생각도 안했을뿐더러, 그땐 살아내기 바빠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이혼을 하고 7년쯤이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눈물이라니 당황스러웠다.

    모든게 산산조각 났는데 육신만은 산산조각 나지 않았으니 정말 꾸역꾸역 마지못해 살고 있었을 때는 막상 미워하지도 못했었다

    비로소 이제야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미움이란 감정이 올라왔고 나는 그것을 반갑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감정과 과정 중 하나를 당시의 나는 생략한 채 왔으니까, 내 마음 어딘가가 제대로 만져지지 않았을거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우 미움을 마음껏 혼자서 해볼 수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라니,

    그 당시 얘기를 나누던 것도 아니였고 아이들 얘기를 하고 있다가 당시의 일들이 연관되어 현재 시점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얘기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내 문제로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잘 흘리지 못하는 나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한테 돌아온 말은 ‘진정한 회복’이 일어날 거 같아. 라는 자매들의 대답이었고,

    ‘진정한 회복이라니? 이제까지도 회복되었는데 무슨 회복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하는 질문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틀 전 다니엘서를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관계를 나또한 하나님에게 갖길 바랬고 기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새벽 화장실에 가기위해 눈이 떠졌고,

    평소엔 보지 않는 남편의 핸드폰이 옆에 있어 시계를 보기위해 보다가 여러 가지 것들을 들여다 봤다.

    그 안에는 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 할 요소들이 존재했다.

    요소의 반은 지난 결혼생활에서 겪었던 두려움 요소의 반은 재혼 후 겪었던 두려움 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요소는 어릴 적 가정환경에서 느껴오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문자 속 특정 단어들로 인해 이미 나는 두려움을 덮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 내가 있었다.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태도를 보면서 어제 묵상영상일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이 불안하고 두려우세요? 두려움에 어떻게 반응 하시나요?’ 하면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 그것에 대응하던 나의 반응들, 앞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을 나누던 차였고

    영상을 업로드한지 6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에게 영상 속 질문에서 내가 나에게 바라던 모습을, 그리도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의 고백을 보며 내가 소망하던 모습을,

    시험해 보는 시험대에 올라온 듯한 기분이었다

     

    불안은 두려움으로 변했고 두려움은 ‘내가 다 알아야겠고 알고싶어.’로 변했고, 다 알아야겠는 마음은 결국 솔직함을 가리고 본 것을 보지 않은체 하고 싶은 거짓의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어디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갈 수 있는지... 얼마나 멀리도 갈 수 있는지...를 다시 경험하게 되다니 절망이었다.

     

    어차피 내가 알 수 있는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침일기를 썼다.

    아침일기를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다.

     

    내가 이혼을 하며 잃어버린 것은 남편도 아닌, 가정도 아닌 신뢰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구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작은 요소만 나타나도 두려움을 향해 빠르게 가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걸까? 

     

    일기를 쓰다보니 아빠가 생각났다.

    나는 아빠에게 불안의 요소가 전혀 없어서 아빠를 사랑하고 신뢰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빠는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빠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그렇다면 애당초 신뢰란 뭘까?

     

    〖 신뢰 : 굳게 믿고 의지함 〗

     

    아빠의 불안한 요소는 내가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를 굳게 믿고 의지한다. 그것은 아빠란 존재가 완전해서가 아니었다. 

    아빠가 어떠하건 사랑함이 나에게는 생겨났다. 

    그리고 난 여전히 아빠의 불안한 요소를 두고 소망한다. 선한 것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한다. 

    그것이 신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 신뢰의 지지기반은 나에게 주어진, 혹은 주어졌던 누군가의 부족함이나 그로인한 경험이 아닌 

    부족한 토양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보살핌, 그분의 일하심, 소망을 두고 나아감. 허물을 용서하고, 상대를 사랑함인거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했고,

    나의 아빠가 나를 그렇게 사랑했고,

    내가 그렇게 아빠를 사랑하고,

    내가 그렇게 여보를 사랑하는 것,

     

    내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인 거 같다.

    남편을 향한 신뢰

    남편의 어떠함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그렇게 하지 아니하더라도’ 신뢰

    그것이 가능했고, 다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회복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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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hye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