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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 함께 걷는
    고요한 2022. 11. 8. 11:32

     2022년 11월 8일 / 단 3:19-30

     

    > 요약

    자신이 만든 신상에 다니엘의 친구들이 절하지 않자 느부갓네살은 분하여 풀무불을 칠배나 뜨겁게 해 그들을 넣으라 한다. 풀무불에 그들을 집어넣은 자들은 불에 타 죽었는데 풀무불속에 다니엘 친구들과 신의 아들같은 한 사람은 상하지 않음을 보고 왕은 그들을 부르고 그들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는 자는 몸을 쪼갤거라 한다.

     

    > 묵상

    느부갓네살은 정말 쉽게 급변하는 사람이었던 거 같다. 자신의 협박과 설득이 통하지 않자 왕은 얼굴빛이 변해 평소보다 풀무불을 칠배나 뜨겁게 하라고 한 후 다니엘의 친구들을 불에 던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용사 몇 사람이 타 죽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반응은 나오지 않고 풀무불에서 세사람이 아닌 네사람, 그 네 사람이 상하지 않음에만 반응한다. 

    이 부분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명령으로 인해 몇 사람이 죽었는데 그들의 목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풀무불에 신의 아들같아 보이는 사람까지 네명이 있는 것, 그리고 그 네명 모두 상하지 않는 것, 이런 놀라운 이적에만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리고 직접 풀무 아귀까지 가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를 나오라 한다.

    그들은 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도 않았고, 그으름의 냄새 또한 없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완전하고 온전하게 지키셨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과 정말 대조된다.

    왕은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지 않았고, 자신의 명령으로 죽게해놓고 반응조차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을 지키시고, 느부갓네살의 명령으로 죽음에 놓인 세 친구들과 직접 함께 풀무불을 걸으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다.

    놀라운 기적을 본 왕은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금의 상황을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 밖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은 종을 구원하셨다고(28)’ 해석한다. 

    그러면서 너무나도 느부갓네살 답게 이젠 하나님꼐 경솔히 말하는 자는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는다고 한다.

    언제나 반응이 폭력으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이 왕에겐 백성의 고통에 함께 함도 없고, 이 왕은 비폭력인 것도 없다.

    그것이 아직은 느부갓네살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 혹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의 하나님’인 것의 증거라 생각한다. 

     

    참, 이상했다. 느부갓네살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반응은 그렇다쳐도- 이 놀라운 일에 이렇게까지 다가가서 반응하고 상황을 또 빨리 수용하고 마치 이 모든 과정이 자신의 명령에 의해 일어난 일중에서 벌어졌다는 걸 저 멀리 어디서 구경한 사람처럼 갑자기 객관적으로 얘기하는 모습이 좀 기이했다. (난 이번 정부가 청와대를 옮기면서 경찰인력이 대통령으로 인해 사용될 수 밖에 없는데 경찰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얘기하는 윤석열도 좀 기이했는데 그런걸 보는 느낌이다.)

    인격적으로 굉장히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더 왕과 하나님이 대조가 되었던 거 같다.

    하나님은 마치 제3자의 일처럼 행동하지 않으시고 직접 풀무불에 오신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인지 천사를 시킨 것인지 육신을 입기 전 예수님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함께 걸으신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함께 걷는 자인가?’ 생각해봤다. 

     

    어릴 적 ‘그건 네 인생이니까 네가 선택하고 네가 책임져.’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엄마의 마음은 나의 자립과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이었겠지만 십대, 이십대의 나에게 그 말은 ‘그건 나와 상관 없는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로 느껴졌다.

    실제 나도 아이들의 많은 부분을 존중하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존중이나 혹은 관여치 않음이냐를 느낄 수 있는게 ‘말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방식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릴 적 내가 느끼던 ‘나완 상관없는 일’로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방금 처음으로 들었다. (난 내가 굉장히 쿨한 엄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진짜 필요하고 함께 걷는 부분은 함께 걸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방식이 아이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었겠다 싶다. 

     

    함께 걷는 것, 그리고 함께 걷는 다는 것을 상대가 느낄 수 있게 하는 방식

    그것을 오늘 하나님은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셨고, 그것을 이전부터 다니엘의 친구들은 경험하고 느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인하여 ‘그렇지 아니하더라도’의 어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결국 신뢰와 믿음은 이사야서 43:2절에서의 말씀인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를 이 시점에서 직접 실제적으로 세 친구가 경험케 하신다. 

    너무 놀랍고, 감격스럽고 영광이라 느껴질 거 같았다. 이렇게 믿음의 걸음을 걷다보면 그 말씀이 내게 임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느껴봤을거라 생각하기에 오늘 세 친구들의 감동을 조금은 이해할 거 같다. 

     

    진정한 신뢰관계. 그것이 기초가 된다면 엄마인 나의 어떠함이 자신의 원함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의 신뢰와 사랑이 나의 자녀에게 있을 거 같다.

    그 모습을 내가 아이들보다는 남편에게 훨씬 많이 보여주고 살았고,

    그래서 남편에게 그런 신뢰와 믿음의 고백이 많이 나오는 거 같다.

    앞으로 아이들을 향한 방식에도 좀 더 마음을 써야겠다.

     

    > 삶

    1.아이들에게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고민하고 표현하기

    2.이제까지 표현 중에서 ‘그건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해.’의 표현이 아니라 ‘엄마는 네 선택을 존중해. 그리고 그 선택에 힘듦이 생겨서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함께할거야.’의 표현이 더 맞는거 같다. 

     

    > 기도

    하나님, 참으로 세밀하게 말씀 하신다고 느껴집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이전에도 말씀하고 계셨지만, 이토록 세밀하게 하나하나 기억나고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해요. 전반적인 굵직한 것들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섬세한 부분들을 놓치고 갔던것이 많은데 그런 부분을 알게 해 주시는 거 같습니다. 

    자신의 명령으로 죽은 병사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느부갓네살이 눈앞의 기적에는 놀라워 또 극단적인 반응으로 그것에 대응합니다. 그가 얼마나 힘, 기적, 이러한 것들을 추구했는지 알 거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세 친구들의 고난에 함께 걸으시고 그들을 지키십니다. 그렇게 함께 걷는 것이 지키는 길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드네요. 

    하나님, 그리하여 제가 아이들로 하여금 ‘엄마가 함께 걷는다.’의 느낌을 갖도록 아이들의 뿌리를 단단하게 지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시려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도 해를 두려워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시시 때때로 필요한 것을 먹이시고 안내하시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오늘도 하나님을 찬양해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과 보호를 받은 것을 저만 누리지 않고 곳곳에 흘려 보내길 기도합니다.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 자세히 말씀해 주셨던 2019년처럼 이젠 아이들에게 그리 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길 도와주세요, 주님.

     

     

     

     

    댓글

K. hye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