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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지킬 수 있는 힘
    고요한 2022. 11. 7. 11:23

    2022년 11월 7일 / 단 3:1-18

     

    > 요약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낙성식에 참석해서 악기 소리가 날 때 신상에게 절하라한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그리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니엘과 친구들에 대해 갈대아사람이 참소하고 왕은 이들에게 신상에게 절하라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에 던진다 한다. 그들은 그하나님이 자신을 지킬 것이라 하면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 한다.

     

    > 묵상

    느부갓네살을 보면서 느끼는게 가진 것이 없어서 갖게 되는 두려움과 달리 가진 것이 많아 갖게되는 두려움이 존재함을 본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힘있는 나라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꿈자리로 인해 모든 지혜자들에게 무리한 요구와 함께 그들을 죽이게 하려하였고 다니엘을 통해 꿈에 대한 해석을 명확하게 들었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그라 들지 않고 오히려 커졌다는게 오늘 본문을 통해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거 같다. 큰 나라의 왕이지만 그것을 침범하는 또다른 나라가 생길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음을 들었으니 말이다.

    느부갓네살은 그 속에서 언제든 권련이란 사라질 수 있는 허망한 것임을, 영원하지 않은 것임을 알고 겸손할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그는 그것을 유지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득권을 유지하게 해 줄 신이 필요했고, 이젠 모든 사람이 자신과 뜻을 다하길 바라고 있다. 당연히 그 뜻에는 두려움이 기저에 깔린채 유지하고 싶은 권력과 힘을 향한 욕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느부갓네살은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있다. 

    신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이제 사람들은 졸지에 풀무불에 던져질 존재가 된다. 내 욕망을 점철시키기 위해 생명의 가치를 이토록 하찮게 여기는 것이 놀랍다. 

    사람들은 힘과 두려움 앞에서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다니엘과 친구들이 거슬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 다니엘과 친구들이 취한 행동은 정말 극소수자에 들어갔을 거 같다. 엄청난 군중들이 다 신상에게 절을 하고 있을 때 그 4명만이 절하지 않으니 얼마나 소수자에 들어가는가?

    마지못해 상황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그런 소수자인 다니엘과 친구들을 그대로두지 못하고 왕에게 일러바친다.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라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이 신은 ‘왕의 신’이지 ‘우리들의 신’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 

    정치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왕의 힘 앞에서 기존 자신들이 섬겨오던 신이 아닌 새로운 신에게 절하고 있을 백성들의 혼란과 고통 그것이 결국 다니엘과 친구들을 향한 화살로 이어진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가 해나가고 있는 걸 볼 때 아니꼬움을 느낄 수 있구나하고 여겨진다. 

    왕은 당연히 왕이 해온 방식대로 다니엘과 친구들에게도 협박을 하며 신상에게 절하길 권한다.

    이 본문에서 가장 좋았고 마음에 남았으며 우리의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지점은 18절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이다. 

    상황을 벗어나는 것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거라 생각한다. 내 앞에 놓여있는 문제상황에서 벗어나는 때만 바라보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처럼 대하지 않는 태도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바라는 상황과 다른 모습이라 할 지라도, 설사 그것이 불 가운데서 내가 죽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왕의 신들에게 절하지 않는 것, 그게 우리가 지켜야하는 태도 같다. 그런데 많은 것들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절하지 아니함’의 태도를 ‘절하지 아니하면 너를 풀무불에 던지리라’의 태도로 타자를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은 거 같다.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지만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가 할 때 아니꼬움을 느끼지 않는가?

    나는 내가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두려움으로 통제하는가?

    아니면 나는 내가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상황이 나의 뜻대로 흐르지 않아도 나 스스로 지킬 것을 지켜내는가?

    첫번째 질문은 사회안에서 두번째 질문은 가정내에서 많이 하게 되는 거 같다. 

    즉, 첫번째 질문에 있어서는 나는 사회 안에서 부끄럽고 두번째 질문에 있어서는 가정안에서 부끄러움이 많다.

    요즘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 이전에 내가 옳다 여기며 추구하고 좋음이라고 받아들이고 쥐고자 했던 것들,

    수용하지 못했던 우상숭배라 여겼던 것들, 그것들이 달리 다뤄지고 있어서 당황스러운 거 같다.

    그것들의 추구가 잘못 되었던게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함의 방식이 어땠는지 내게 계속 묻는거,

    하나님은 내게 지속적으로 ‘너는 정말 인격적으로, 너는 정말 자유하게, 너는 정말 두려움으로 통제하려 들지 않고, 너는 정말 그것을 사랑으로’ 하였느냐고 하나님이 나의 에디튜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아무래도 시기적으로 아이들이 10대가 되었고,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세계가 내가 원하는 세계와 충돌이 있으니 그 갈등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안하고만큼 중요한것은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임을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 삶

    1.지금 아이들이 보고싶어하고 즐기고 싶어하는 문화에 대해서 남편과 먼저 상의하고 얘기해본 후 아이들하고도 얘기나누기

    2.기도하기, 어떤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어떤 태도를 갖추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 기도

    하나님, 꿈해몽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겸손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신상을 세우고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통치합니다. 하나님, 내가 나의 자리에서 두려움으로 통치하려던 것이 없었을까요? 체벌하지 않는 엄마라 하여도 어떤 문화를 바라볼 때 내가 이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전이시킬 수 있는거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나는 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룬 이들을 볼 때 아니꼬운 이도 제게는 있습니다. 옳다 여겨지는 것, 추구하고 바라는 것을 차근 차근 성실하게 밟아오지 못한 삶을 산 건 나인데 힘들게 이뤄낸 이들의 과정은 보지 못하면서 나는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무언가를 취하고 싶은 탐심이 제게 있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셔서 힘든 과정들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제게 길러지길 기도합니다. 가정에 있어서건, 사회 속에서건, 상황과 관계와 결과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다니엘 친구들의 고백처럼 제게도 머무르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른 것들을 기웃거리며 욕망과 두려움 앞에 엎드리는 제가 되지 않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힘과 지혜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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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hye 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