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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 나도 누리고 싶어요.
    고요한 2022. 9. 5. 11:51

    20220905. 월 / 엡2:11-22

     

    > 요약

    예수님을 알고 그를 통하기 이전에 나뉘었으며 하나님도 세상에 소망도 없던 이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도록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 묵상

    바울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지어졌다.’라고 말하지 않고 ‘지어져 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며 연결이 되고 있으며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한다고 한다.

    말 그래도 우린 완성 되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 말은 나도, 타자도 지어져 가는 중이라는 것이며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모습이 같은 모습이란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고유성을 가진 우리가 따로가 아닌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성을 띄는 존재인 것인데,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씀을 굳이 빗대어 표현하자면 난 손으로 할례를 받은 무리에게 할례를 받지 못한 자라고 칭함 받는 무리에게 있어서 그들과 연결되고, 그들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손으로 할례를 받은 무리들과 연결되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힘들다. 너무 힘들다.

    나와 다른 신앙의 색깔들을 가진 이들을 받아들이기가, 특히 기존 기독교에 지배적으로 있던 신앙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어떠한 부분은 날 숨막히게 한다.

     

    어젠 그토록 나가고 싶었던 자매모임에 몇 달 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선 호흡에 곤란함을 느낄만큼 질식할 거 같은 감정이 되어 중간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런 정서적 상태인지 아는 자들은 없었지만 그건 나만 느낄 수 있는 거다.

    왜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존 신앙생활에서 느꼈던 압력을 느끼던 여성리더의 성향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모님이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 회의 내용 또한 자매캠프 장소를 정하는 즐거운 일이었다. 

    난 아직도 과거의 어딘가에 묶여 있는 사람처럼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주도적으로 얘길 하면 숨이 막혀오기 일쑤다.

    일대일로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무리 속에 있으면 그렇다.

    어쩌면 난 권위가 없는 나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방금 날 스친다.

    그리고 또 조금을 다르지만 비슷하게 압력을 느끼던 리더와 비슷한 성향의 다른 사모님이 얘길 한다.

    소그룹 모임이 나눔이 중심이 되면 안된다고 말씀이어야 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가치관의 충돌을 심하게 느낀다.

    난 말씀이 삶과 분리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우리 소그룹의 구조는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내 삶에 녹여 생각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녀가 염려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가 개인적인 친밀감, 개인적인 나눔의 양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말씀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까? 

    그런 염려는 숨통을 조이는 기분이 든다.

    무엇이 더 말씀이 중심인 것인가? 그것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말씀은 중요하지만 난 관계 안에서는 그 존재에 집중하고 싶다. 그건 소그룹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모임이 처음 형성된 목적이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인데 많은 딴지와 의문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그럴때마다 난 또다시 질식할 거 같다.

     

    어제의 날 돌이키고, 오늘의 말씀을 바라보니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 다는 것 _ 그것은 꼭 같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그들이 왜 불편한가? 그냥 수용하면 되는 문제인건데-

    어쩌면 정말 아무 권위도 없는데 나의 생각과 다르게 이끌어지고 있는 것의 힘에 무력감을 느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아까 나의 생각처럼 나는 그런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어릴적부터 자유로왔고, 전체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전체 속에서 그것을 온저히 따르지도 않았던 나이기 때문에 더 이런 것들이 힘들겠지

    그렇다고 내가 통제적이지 않은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중요하다 여기는 어떠한 부분은 난 부모로서 강한 통제권을 가진다. (그 외의 것들은 자유롭게 두지만) 

    나의 생각의 리드는 되고, 그들의 생각은 안되는게 뭘까?

    나는 지금 나만 옳다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게 아닐까? 

     

    하나님은 오늘 내게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너는 이제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다.’라고 하신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를 외인, 나그네로 고립시키고 있다.

     

    숲에에게 그렇게 중요시 했던 말 “네가 널 고립시키지 마.”라고 했는데

    내가 날 고립시키고 있었네

    내가 나의 모습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고립시킬 필요도, 타인의 다름새도 부정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고, 그 모양 그대로 사랑스러운 존재인데

    나는 무엇을 이렇게 애 쓰는가?

    나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빠진 기분이다.

     

    > 삶

    1. 나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나를 덫으로 삼지 않도록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지

    2. 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라고, 그들의 다름이 틀리지 않았다고 되니이며 만남을 가져야지.

     

    > 기도

    하나님,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셨는데 전 사랑이 없습니다. 내가 나에 대한 확신 없음은 내가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에 의문과 딴지를 걸며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하고 스스로를 질식시키고 있었네요. 오늘도 나를 구덩이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바라봅니다.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이 같은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정말 이제는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외인도 나그네도 아님 동일한 시민이고 하나님의 권속인 것을, 뼛속 깊이 상기하고 내가 날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길 또한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모퉁잇돌이 되셔서 우리 각 존재들을 세워가시고 또한 연결해 가시는 그 애씀과 사랑을 기억하고 누리는 제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랜시간 신앙생활 안에서 쌓인 상처가 뿌리가 남겨져 자라질 않길 기도하오니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길 바랍니다.

    나 혼자 내가, 나만 가득하지 않길 기도합니다. 도와주세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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