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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 또 조금 있어도 보지 못했던 영역
    고요한 2022. 4. 7. 08:19

    20220407.목 / 요16:16-24

     

    > 요약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또 조금 있으면 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슬픔과 근심이 아이를 낳은 엄마와 같이 세상에는 기쁨이 될 것이라 설명을 해주며 이제까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 하신다.

     

    > 묵상

    예수님의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는 말씀이 나는 죽음과 이후의 재림만을 말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또 조금 있으면 보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설명한 것들과 함께 생각해 보았다. 

    분명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의미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구하라는 점, 그러면 주실 것이라는 말과 제자들의 애통이 세상의 기쁨이 되고 제자들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거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 봤을 때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지만 이후 부활하신 이후에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시는 예수님이 이들에게 성령을 내려주게 되는데,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보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까지 같이 먹고 따라다닐 뿐 예수님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예수님 말도 못알아 들었고, 여전히 오늘도 못알아 듣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심을 완전하게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의 가치에 대해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전하고 그분의 삶을 전하고 그분의 가치를 받아들이며 추구하고 살아갈 때 그들은 비로보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예수님이 죽음으로 인한 그들의 근심은 그들에게도 세상에도 기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생각이 든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재림 이후라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만한 것이 있을까? 없을 거 같다. 예수님이 재림했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었다면 그들이 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누려야 할 대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화되어 살아갈 삶에서 그들이 내적으로 또한 삶으로 구현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제까진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 구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아님으로 예수님이 바라시던 것들, 이루고자 하시던 것들을 구함으로 이루어낼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도 그 부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내면적으로 그리고 내 삶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보지 못하지만  조금 있으면 보게 되는 것 같다. 늘 내가 예수님을 보는 삶을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어제 가정예배때 남편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데 남편이 예수님이 살다 죽기까지 보여주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 삶에서 날 유혹해 그 삶을 따라살지 못하게 하는 영역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난 그 부분에 있어서 가장 안되는 부분이 기도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에서 사회와 사람을 위해 나타내신 것들은 그래도 내가 방향성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데 예수님 개인의 삶을 보았을 때 그분은 하나님 이시면서 기도를 하셨는데, 난 기도를 쉽게 소홀히 하게 되고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날 소홀히 하게 하는 유혹이 구체적으로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나의 신앙생활을 큐티나 기독교와 관계된 여러 공부를 하면서 이성을 채우는 면은 있지만 기도는 이성을 채우는 영역은 아니여서 인지 소홀하게 된다. 그만큼 난 어쩌면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신앙생활을 하는 거 같다. 하지만 배덕만 교수님의 강의에서처럼 신앙이란 이성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 기독교에는 분명 신비하고 초월적인 영역이 있는 거라고 그것이 너무 강조되는 것은 안되겠지만 그것이 배제되는 것 또한 옳진 않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내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앙생활 이후 내가 교회에서 내가 경험한 기도는 ‘나의 소원 들어주기’ 혹은 ‘신비한 체험’을 위한 간접경험이 초반에는 강해서 그것을 주의하기 위해 오히려 내가 나의 기도를 소홀히 했던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 나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 내가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세, 그렇게 삶을 감당하고 나를 쏟아내고 새 힘을 공급 받으며 또다시 살아가고 의도하진 않아도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사랑과 같은 감정들을 회복하는 경험 같은 것도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되니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 삶   

    1. 일단은 습관이 잘 안되니 큐티 후 기도부터 회복하자

     

    > 기도

    하나님,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또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재림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주신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보고, 내 삶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조금이라고 구현하려 애쓰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근심이 결국 기쁨이 되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 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무엇보다 저는 참 기도의 시간에 소홀합니다. 지적욕망이 가득한 제게 기도는 지적인 것을 채워준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기도의 소중함,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 위험한 기도에 대한 경계해야 함 등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았던 저의 나약함과 완악함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기도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 기도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교제하고 싶어하시는 예수님께 내 안의 것들을 쏟아내며 정화되고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절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 주세요.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 요청드리는 겸손한 제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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